찬송
성경 본문
눅 24:29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찬송묵상
누가 주님처럼 나를 보호하리요 사랑의 주여 함께하소서.
찬송요약
1절, 때 저물어 날이 어둡고 내 친구 날 위로 못하니 주여 함께하소서.
2절, 사는 날 속히 지나고 세상영광 빨리 지나니 변찮는 주여 함께하소서.
3절, 누가 주님처럼 나를 보호하리요 마귀 물리치신 사랑의 주여 함께하소서.
4절, 육신 쇠해 눈감을 때 내 모든 슬픔 위로하시고 생명의 주여 함께하소서.
2절, 사는 날 속히 지나고 세상영광 빨리 지나니 변찮는 주여 함께하소서.
3절, 누가 주님처럼 나를 보호하리요 마귀 물리치신 사랑의 주여 함께하소서.
4절, 육신 쇠해 눈감을 때 내 모든 슬픔 위로하시고 생명의 주여 함께하소서.
찬송해설
눅 24:29-32절 말씀을 배경으로 스코틀랜드 태생의 찬송가 작가인 헨리 프란시스 라이트(H.F.Lyte;1793~1847)목사가 1847년에 작사하였다. 천식과 폐병으로 인해 교회를 사임하고 출발하기 전날 저녁 해변을 걸으면서 하나님과 속삭인 찬송시이다. 곡은 교회음악발전에 크게 공헌한 영국 태생의 교회 음악가 윌리암 헨리 몽크(W.H.Monk;1823~1889)박사가 1861년에 작곡하였다.
찬송프롤로그
1절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1절, 때 저물어 날이 어둡고 내 친구 날 위로 못하니 주여 함께하소서.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친구’(요 11:11)라고 불렀던 사람은 나사로 한 사람뿐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을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라는 곳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주로 베다니에 모여 살았는데 이곳에는 여러 개의 돌무덤이 많아 빈민굴, 빈민촌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였고 여리고 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면 반드시 베다니 나사로에 집에 들러 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었던 나사로의 가정에 갑자기 불행이 닥쳤습니다. 그것은 소년가장으로 수고했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나사로의 병이 호전되지 않고 점점 더 악화 되어가자 마르다와 마리아는 긴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계시던 곳(베뢰아)에서 이틀을 더 유하신 후에 나사로를 고치시려 유대 땅 베다니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때는 이미 나사로는 죽어서 돌무덤에 묻혀있었습니다(21절).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실 때 나사로의 죽음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에서 위문하러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 앞에서는 찬송가 1절에 기록 되어 있듯이 “그 어떤 친구도 위로하지 못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통곡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모습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절). 이처럼 우리에게 죽음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한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왕 노릇하게 되었고 어디를 가든지 질병과 괴로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죽음은 원수요, 분리요, 쏘는 것입니다. 죽으면 호흡이 끊어지고 호흡이 끊어지면 모든 활동도 중단됩니다. 뿐만 아니라 죽으면 육체가 차가워지며, 감각이 없어지며 종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올 한해도 뒤돌아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이제 우리도 언제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워 날 오라할지 모릅니다.”(찬송가 1절) 그러므로 나 자신을 돌아보아 후회 없는 사명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자신을 힘써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기뻐서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며 늘찬양함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자녀, 건강, 재산, 사업, 직장, 이런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재앙을 만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럴 때 나를 위로할 자 누구입니까?
찬송가 1절에서는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하며 우리를 도와줄 참 친구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어 무덤에 묻혀 있는 나사로를 아무도 돕지 못하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나사로를 돕습니까? 요한복음 11장 39절에 “무덤문의 돌을 옮겨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로하며 걱정하는 척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님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며 말을 건넵니다. 이렇게 말하는 속 내용은 “예수님! 괜히 힘쓰다가 일이 뜻대로 안되면 망신당하지 말고 아예 이쯤에서 그만두시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움 속에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며 마르다에게 “네 믿음을 보이라”고 질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사로의 무덤을 막았던 돌문을 밀어내자 캄캄한 굴 무덤이 나타났고 정말 시체 썩는 냄새가 주위에 온통 진동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당황함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1-42절)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43절)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죽어 이미 매장됐고, 냄새까지 내 풍기는 나사로가 얼굴은 수건에 싸인 채로, 수족은 베로 동인채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구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만 하면"(찬송가 1절) 모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영생으로 바뀌고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더욱이 IMF의 여파와 글로벌 경제 위기, 그리고 구제역과 유가의 폭등으로 어려운 경제 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절망과 낙담과 원망 속에 갇혀 살지 말고 “일어나서 나오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하여 나의 고정관념과 자아를 버리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나사로가 수족을 묶인 채로 나오자 예수님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44절)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수족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과 참 자유를 주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사로의 몸에 묶은 베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사명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말은 우리주위에 낙심과 근심과 염려와 고통으로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찾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결박시키고 있는 사탄의 궤계를 푸는 역할을 우리가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을 가지고 낙심한 영혼들에게 찾아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절망과 죽음에서 건져내어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 귀한 마지막 사명이 우리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지적인 믿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드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에는 예수 부활의 기적이 계속되어 질것입니다. 부활의 기적, 승리의 기적이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새롭게 맞이하려는 여러분 모습 속에 귀한 역사와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1절, 때 저물어 날이 어둡고 내 친구 날 위로 못하니 주여 함께하소서.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친구’(요 11:11)라고 불렀던 사람은 나사로 한 사람뿐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을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라는 곳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주로 베다니에 모여 살았는데 이곳에는 여러 개의 돌무덤이 많아 빈민굴, 빈민촌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였고 여리고 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면 반드시 베다니 나사로에 집에 들러 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었던 나사로의 가정에 갑자기 불행이 닥쳤습니다. 그것은 소년가장으로 수고했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나사로의 병이 호전되지 않고 점점 더 악화 되어가자 마르다와 마리아는 긴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계시던 곳(베뢰아)에서 이틀을 더 유하신 후에 나사로를 고치시려 유대 땅 베다니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때는 이미 나사로는 죽어서 돌무덤에 묻혀있었습니다(21절).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실 때 나사로의 죽음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에서 위문하러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 앞에서는 찬송가 1절에 기록 되어 있듯이 “그 어떤 친구도 위로하지 못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통곡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모습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절). 이처럼 우리에게 죽음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한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왕 노릇하게 되었고 어디를 가든지 질병과 괴로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죽음은 원수요, 분리요, 쏘는 것입니다. 죽으면 호흡이 끊어지고 호흡이 끊어지면 모든 활동도 중단됩니다. 뿐만 아니라 죽으면 육체가 차가워지며, 감각이 없어지며 종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올 한해도 뒤돌아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이제 우리도 언제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워 날 오라할지 모릅니다.”(찬송가 1절) 그러므로 나 자신을 돌아보아 후회 없는 사명의 삶,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자신을 힘써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기뻐서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며 늘찬양함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자녀, 건강, 재산, 사업, 직장, 이런 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재앙을 만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럴 때 나를 위로할 자 누구입니까?
찬송가 1절에서는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하며 우리를 도와줄 참 친구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어 무덤에 묻혀 있는 나사로를 아무도 돕지 못하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나사로를 돕습니까? 요한복음 11장 39절에 “무덤문의 돌을 옮겨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로하며 걱정하는 척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님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며 말을 건넵니다. 이렇게 말하는 속 내용은 “예수님! 괜히 힘쓰다가 일이 뜻대로 안되면 망신당하지 말고 아예 이쯤에서 그만두시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움 속에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며 마르다에게 “네 믿음을 보이라”고 질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사로의 무덤을 막았던 돌문을 밀어내자 캄캄한 굴 무덤이 나타났고 정말 시체 썩는 냄새가 주위에 온통 진동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당황함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1-42절)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43절)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죽어 이미 매장됐고, 냄새까지 내 풍기는 나사로가 얼굴은 수건에 싸인 채로, 수족은 베로 동인채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구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만 하면"(찬송가 1절) 모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영생으로 바뀌고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더욱이 IMF의 여파와 글로벌 경제 위기, 그리고 구제역과 유가의 폭등으로 어려운 경제 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절망과 낙담과 원망 속에 갇혀 살지 말고 “일어나서 나오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하여 나의 고정관념과 자아를 버리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나사로가 수족을 묶인 채로 나오자 예수님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44절)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수족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과 참 자유를 주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사로의 몸에 묶은 베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사명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말은 우리주위에 낙심과 근심과 염려와 고통으로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찾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결박시키고 있는 사탄의 궤계를 푸는 역할을 우리가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을 가지고 낙심한 영혼들에게 찾아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절망과 죽음에서 건져내어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 귀한 마지막 사명이 우리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지적인 믿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드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에는 예수 부활의 기적이 계속되어 질것입니다. 부활의 기적, 승리의 기적이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새롭게 맞이하려는 여러분 모습 속에 귀한 역사와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찬송 예화
저물어 해질 때에
보통 마가복음 1:32의 "저물어 해 질 때에"를 읽을 때 공연한 말을 되풀이하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저물어" 한 마디로 족할 텐데 왜 "해 질 때에"를 덧붙였을까? 그러나 이렇게 되풀이한 강조로부터 성서가 묘사하려던 사건 당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 가르치러 들어가셨다. 귀신들린 사람이 들어와 있다가 나사렛 예수가 누군지를 소리쳐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귀신에게 명령하여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고 하셨다. 그 사람은 나음을 입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 예수께서 제자 중 몇을 데리고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다. 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를 쫓아가 고침을 받고자하였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유대 율법을 양심적으로 지키는 이 사람들은 주께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 를 데려 오게 하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셨으나 병자들은 안식일 율법을 깰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집에서 저녁때가 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저물어 해 질 때에"라는 구절 속에서 이들의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또 동시에 안식일 율법이 이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삶을 얼마나 심하게 옥죄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저물어" 그리고 "해질 때"를 간절히 기다리던 자들은 그 때가 되자 서둘러 병자와 귀신들린 친척이나 친구를 예수께로 급히 데리고 왔다.
<참고: 채수덕 예화/인터넷 목회정보클럽>
보통 마가복음 1:32의 "저물어 해 질 때에"를 읽을 때 공연한 말을 되풀이하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저물어" 한 마디로 족할 텐데 왜 "해 질 때에"를 덧붙였을까? 그러나 이렇게 되풀이한 강조로부터 성서가 묘사하려던 사건 당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 가르치러 들어가셨다. 귀신들린 사람이 들어와 있다가 나사렛 예수가 누군지를 소리쳐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귀신에게 명령하여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고 하셨다. 그 사람은 나음을 입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 예수께서 제자 중 몇을 데리고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다. 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를 쫓아가 고침을 받고자하였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유대 율법을 양심적으로 지키는 이 사람들은 주께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 를 데려 오게 하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셨으나 병자들은 안식일 율법을 깰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집에서 저녁때가 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저물어 해 질 때에"라는 구절 속에서 이들의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또 동시에 안식일 율법이 이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삶을 얼마나 심하게 옥죄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저물어" 그리고 "해질 때"를 간절히 기다리던 자들은 그 때가 되자 서둘러 병자와 귀신들린 친척이나 친구를 예수께로 급히 데리고 왔다.
<참고: 채수덕 예화/인터넷 목회정보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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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변하고 친구가 변해도 신실하신 주님 항상 나와 함께 하소서. 마귀가 날뛰고 죽음이 온다 해도 두려움 없이 내 주님만 의지하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