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성경 본문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찬송묵상
아침 햇살 비추듯 구원과 소망의 빛을 비춰주시는 예수님
찬송요약
1절, 아침 햇살, 빛나는 태양처럼 주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안과 기쁨
2절, 소망되시는 주를 모신 사람들 어떤 풍랑과 어두움을 만나도 승리하리라
3절, 죄 씻음 받은 은혜와 기쁨과 평강을 거룩한 향기와 빛이 되어 세상에 비추자
2절, 소망되시는 주를 모신 사람들 어떤 풍랑과 어두움을 만나도 승리하리라
3절, 죄 씻음 받은 은혜와 기쁨과 평강을 거룩한 향기와 빛이 되어 세상에 비추자
찬송해설
예수님을 구주를 영접하고 새 사람 되어 살아가는 자들의 영적 기쁨과 소망을 아침 햇살, 빛나는 태양, 거룩한 향기로 표현하고 있는 찬양으로 강원도 속초 출생으로 일본 다이도오 학원 중퇴, 강릉사범학교, 서울 인창, 동성 고등학교 교사 역임, 강남 사회복지대학, 숭의 여자대학 강사역임, 한국 크리스찬 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이사로 있는 황금찬(黃錦燦;1918~ )시인이 1977년 작사하고, 충남 청양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작곡과, 일본 도쿄음악대학, 무사시노 음악대학대학원을 졸업, 대한신학교, 건국대 사범대 음악교육과 교수를 역임한 황철익(黃哲益;1932~ )교수가 2002년 곡을 붙였다.
찬송프롤로그
1절
아침햇살 비칠 때 찬란하듯이 주님 얼굴 대할 때 마음 즐겁다
우리주님 내 맘에 빛나는 태양 문 앞에서 머무시는
주님 영접해(주님 영접해) 한 평생을 주와 함께 살아가리라
요한복음 1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빛은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내 곁에 와 달라고 우리가 사정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빛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감격할만한 일입니까?
대개 유명한 사람을 만나려 하거나 권세 있는 사람을 만나려면 내 쪽에서 먼저 요청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만나는 것이 좋을 것인지 상의해서 만날 시간을 결정하게 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아주 유명하거나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일방적으로 약속시간을 정해버릴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느 시간을 정해놓고 만나고 싶으면 그 시간에 오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참 빛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 쪽에서 만나달라고 요청한 일이 없습니다. 만날 시간약속을 정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참 빛 되신 분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 그 빛을 비추기 위해 그분이 이 보잘것없는 죄인 된 우리와 세상을 향해 먼저 손을 내 미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아서 그랬는지 사람들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0절과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목요일 마다 전도대에 참여하여 전도를 하시는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그 날은 그 집사님이 세를 준 가게에 전도를 나가기로 결정하고 모두 모여 열심히 기도한 후 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에 세 들어 있는 사람이 주인인 그 집사님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왠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 이상소리를 하고 있나?"하는 표정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표정을 보면서 '자신이 이 집에 세를 준 주인'이라고 했더니 그제야 반갑게 맞아주었고, 복음을 제시할 때 순순히 듣더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를 주고는 거의 한 번도 그 세든 사람을 만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경우가 편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자꾸 왔다 갔다 하면서 살피면 괜히 내가 잘못한 일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실은 여러모로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주인이 세 든 사람의 집을 자주 방문하는 것은 기분이 상쾌한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세 들어 사는 사람이 그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은 참 빛 되신 그분은 세상을 지으신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에 의해 지음을 받은 세상은 당연히 주인 되신 그분을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주인이라고 나타난 것도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주인에 대한 얘기가 있어왔고, 가깝게는 침(세)례 요한에 의해 그분에 대해 다시 증거 되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주 가까이 그들 곁에 왔는데도 그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이분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 분이 오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정작 그분이 왔을 때 그분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알아보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하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니 왜 그분을 거절하는 것일까요? 왜 그분을 영접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자신들의 마음에 그분을 받아들일만한 공간을 남겨놓지 않고 세상적인 일과 자신들의 욕심으로 가득 채워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필요한 세상의 것들로 온 마음과 생각이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을 사치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삶의 안정을 가질 때 생각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그런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가난하다는 것을 핑계로, 돈이 많아 더 많이 세상 부귀영화를 누려본 후에 예수님을 믿게 다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언제든 세상을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2장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분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마음에 모셔 들이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시작은 그분을 내 마음 한 가운데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전적으로 그분 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변화입니까? 신분의 변화입니다. 어떻게 신분이 변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을 내 삶의 왕으로 모시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남편이 왕이 되면 아내는 황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왕이면 자녀는 자연히 왕자가 되고 공주가 됩니다. 그런 축복된 삶이 열려지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그 마음이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으로 마음의 평안함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 얼굴이 창문에 찬란하게 드리운 아침햇살처럼, 정오의 빛나는 태양처럼 밝게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쁨과 은혜의 감격을 오늘도 참 빛으로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 문 앞에서 두드리시며 열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므로 한 평생을 주와 함께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축복이 있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침햇살 비칠 때 찬란하듯이 주님 얼굴 대할 때 마음 즐겁다
우리주님 내 맘에 빛나는 태양 문 앞에서 머무시는
주님 영접해(주님 영접해) 한 평생을 주와 함께 살아가리라
요한복음 1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빛은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내 곁에 와 달라고 우리가 사정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빛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감격할만한 일입니까?
대개 유명한 사람을 만나려 하거나 권세 있는 사람을 만나려면 내 쪽에서 먼저 요청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만나는 것이 좋을 것인지 상의해서 만날 시간을 결정하게 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아주 유명하거나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일방적으로 약속시간을 정해버릴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느 시간을 정해놓고 만나고 싶으면 그 시간에 오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참 빛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 쪽에서 만나달라고 요청한 일이 없습니다. 만날 시간약속을 정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참 빛 되신 분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 그 빛을 비추기 위해 그분이 이 보잘것없는 죄인 된 우리와 세상을 향해 먼저 손을 내 미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아서 그랬는지 사람들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0절과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목요일 마다 전도대에 참여하여 전도를 하시는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그 날은 그 집사님이 세를 준 가게에 전도를 나가기로 결정하고 모두 모여 열심히 기도한 후 가게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에 세 들어 있는 사람이 주인인 그 집사님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왠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 이상소리를 하고 있나?"하는 표정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표정을 보면서 '자신이 이 집에 세를 준 주인'이라고 했더니 그제야 반갑게 맞아주었고, 복음을 제시할 때 순순히 듣더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를 주고는 거의 한 번도 그 세든 사람을 만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경우가 편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자꾸 왔다 갔다 하면서 살피면 괜히 내가 잘못한 일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실은 여러모로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주인이 세 든 사람의 집을 자주 방문하는 것은 기분이 상쾌한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세 들어 사는 사람이 그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은 참 빛 되신 그분은 세상을 지으신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에 의해 지음을 받은 세상은 당연히 주인 되신 그분을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주인이라고 나타난 것도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주인에 대한 얘기가 있어왔고, 가깝게는 침(세)례 요한에 의해 그분에 대해 다시 증거 되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주 가까이 그들 곁에 왔는데도 그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이분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 분이 오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정작 그분이 왔을 때 그분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알아보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하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니 왜 그분을 거절하는 것일까요? 왜 그분을 영접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자신들의 마음에 그분을 받아들일만한 공간을 남겨놓지 않고 세상적인 일과 자신들의 욕심으로 가득 채워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필요한 세상의 것들로 온 마음과 생각이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을 사치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삶의 안정을 가질 때 생각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그런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가난하다는 것을 핑계로, 돈이 많아 더 많이 세상 부귀영화를 누려본 후에 예수님을 믿게 다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언제든 세상을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2장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분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마음에 모셔 들이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시작은 그분을 내 마음 한 가운데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전적으로 그분 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변화입니까? 신분의 변화입니다. 어떻게 신분이 변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을 내 삶의 왕으로 모시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남편이 왕이 되면 아내는 황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왕이면 자녀는 자연히 왕자가 되고 공주가 됩니다. 그런 축복된 삶이 열려지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그 마음이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으로 마음의 평안함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 얼굴이 창문에 찬란하게 드리운 아침햇살처럼, 정오의 빛나는 태양처럼 밝게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쁨과 은혜의 감격을 오늘도 참 빛으로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 문 앞에서 두드리시며 열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므로 한 평생을 주와 함께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축복이 있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찬송 예화
-아프리카의 개척자 리빙스턴-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일하다가 생을 마친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 대영 제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아프리카의 개척자 리빙스턴, 그가 16년간 밀림에서 선교하다 잠시 영국에 귀국했습니다. 27번째 말라리아에 걸려 사선을 헤매다가 아직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아니한 연약한 몸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사자에게 물린 한쪽 어깨와 팔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마치 몸에 힘없이 달려 있는 것 같이 보일 정도로 나약한 모습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의 설교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 그 일을 위해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을 놓고 즐거워하지 아니한 날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서 많은 희생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하나님께 진 큰 빚의 작은 부분을 갚았을 뿐 인데, 이것을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장차 영광스러운 소망과 복된 상급을 약속 받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희생이 되겠습니까? 그런 말과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절대로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결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우리가 이런 심정을 가지고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일하다가 생을 마친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 대영 제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아프리카의 개척자 리빙스턴, 그가 16년간 밀림에서 선교하다 잠시 영국에 귀국했습니다. 27번째 말라리아에 걸려 사선을 헤매다가 아직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아니한 연약한 몸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사자에게 물린 한쪽 어깨와 팔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마치 몸에 힘없이 달려 있는 것 같이 보일 정도로 나약한 모습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의 설교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 그 일을 위해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을 놓고 즐거워하지 아니한 날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서 많은 희생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하나님께 진 큰 빚의 작은 부분을 갚았을 뿐 인데, 이것을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장차 영광스러운 소망과 복된 상급을 약속 받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희생이 되겠습니까? 그런 말과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절대로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결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우리가 이런 심정을 가지고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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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참 빛 되신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듯이 우리도 그 빛을 비추기 위하여 죄악 된 세상을 향해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무엇보다 내 안에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에 민감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을 새롭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