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성경 본문
요 1:9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찬송묵상
이 세상의 참 빛은 오직 예수뿐
찬송요약
1절, 온 세상이 캄캄 하여서 참 빛이 없었더니 영광의 주 밝은 빛 비추셨네.
2절, 주 말씀을 믿고 주 명령을 행하는 자 그 맘이 시원하고 그 길이 환하네
3절, 죄 가운데 사는 자 그 눈이 어두워도 영광의주 뵈올 때 그 눈이 밝아지네
2절, 주 말씀을 믿고 주 명령을 행하는 자 그 맘이 시원하고 그 길이 환하네
3절, 죄 가운데 사는 자 그 눈이 어두워도 영광의주 뵈올 때 그 눈이 밝아지네
찬송해설
요한복음 1장 9절의 말씀을 배경으로 오직 예수 안에 거할 때만 영생과 참 빛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빛으로 찾아오셔서 어두움 가운데 신음하는 자들의 참된 위로자와 인도자가 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죄를 범한 영혼들의 가슴을 밝히는 등불로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후렴에 ‘영광’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그 빛에 속한 자 만이 영광의 주를 뵙고 영광의 주를 찬송할 수 있다는 이 찬양은 작시․작곡자 모두 불명이다.
찬송프롤로그
1절 온 세상이 캄캄 하여서 참 빛이 없었더니 그 빛나는 영광 나타나 온 세상 비치었네
영광 영광의 주 영광 영광의 주 밝은 그 빛 내게 비추었네 영광 영광의 주 영광
영광의 주 이 세상의 빛은 오직 주 예수님
1절, 온 세상이 캄캄 하여서 참 빛이 없었더니 영광의 주 밝은 빛 비추셨네.
찬송가 1절에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참 빛이 없었더니 그 빛나는 영광나타나 온 세계 비치었네.”로 찬양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그 빛나는 영광 나타나”는 누구를 가르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호세아 6장 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새벽 빛 같이 임하는 여호와”, 동방방사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큰 별을 보고 따라 왔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마 2:2). 그리고 참 빛이신 예수님을 그 마음속에 영접하고 받아드리면 우리 속에 그런 믿음․소망․사랑(고전 13:13)의 역사가 흘러내려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빛으로 오신, 생명의 능력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어두움 세력, 멸망의 세력인 사단을 좇아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라,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인류가 사모하던 음성이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위대하고 장엄한 주제를 가지고 계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선한 목자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에게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빚 되신 예수님의 속성과 더불어 빛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보여야할 영적인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감출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4-15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빛은 숨길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빛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노출하는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중해 연안이나 프라하의 도시에 가보면 높은 산 언덕위에 아름다운 도성들이 자주 눈에 뛰게 되는데 밤에는 휘황찬 불빛에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항상 노출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크리스천으로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서 어두움에 속한 부정적인 모습을 몰아내고 아름다운 생명의 빛, 소망의 빛으로 거듭나도록 힘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빛은 어둠을 밝혀 주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물러가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고, 모든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더럽고 깨끗한 것을, 좋고 나쁜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어두움이 이 세상을 덮고 완전히 빛이 없는 상태가 삼일동안 지속된다면 아마도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비될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면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정체가 있는 그대로 밝혀지고 어둠이 폭로 됩니다. 이처럼 빛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실체를 바르게 알게 할뿐 아니라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마 5:14)이라고 말하며, 바울이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라고 말하는 것은 낮에 자녀로서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밝혀야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망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 사랑의 빛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빛은 사람들을 깨우고 활동하게 하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빛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활동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면 사람들이 잠을 자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자라날 어릴 적에는 시골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해가지면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다시 해가 동녘에 뜨면 일찍이 일을 하러 들로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이후 사람들은 전등의 밝은 빛 덕분에 어느 시간에든지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활동을 하고 일을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빛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깨우고 활동하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고 뭔가를 향하여 움직이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망이라고 하는 어둠의 그늘에서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이 세상을 깨워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표상이 되는 것이 바로 교회된 우리의 속성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마치 캄캄한 바다위에 암초에 걸리지 않도록 등대를 높이 세워서 배가 가야할 길을 바르게 비춰주는 것과 같이 어두운 세상에 교회는 진리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간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그 빛나는 영광”(찬송가 1절)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광 영광의 주 영광 영광의 주 밝은 그 빛 내게 비추었네 영광 영광의 주 영광
영광의 주 이 세상의 빛은 오직 주 예수님
1절, 온 세상이 캄캄 하여서 참 빛이 없었더니 영광의 주 밝은 빛 비추셨네.
찬송가 1절에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참 빛이 없었더니 그 빛나는 영광나타나 온 세계 비치었네.”로 찬양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그 빛나는 영광 나타나”는 누구를 가르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호세아 6장 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새벽 빛 같이 임하는 여호와”, 동방방사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큰 별을 보고 따라 왔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마 2:2). 그리고 참 빛이신 예수님을 그 마음속에 영접하고 받아드리면 우리 속에 그런 믿음․소망․사랑(고전 13:13)의 역사가 흘러내려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빛으로 오신, 생명의 능력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어두움 세력, 멸망의 세력인 사단을 좇아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라,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인류가 사모하던 음성이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위대하고 장엄한 주제를 가지고 계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선한 목자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에게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빚 되신 예수님의 속성과 더불어 빛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보여야할 영적인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감출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4-15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빛은 숨길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빛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노출하는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중해 연안이나 프라하의 도시에 가보면 높은 산 언덕위에 아름다운 도성들이 자주 눈에 뛰게 되는데 밤에는 휘황찬 불빛에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항상 노출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크리스천으로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서 어두움에 속한 부정적인 모습을 몰아내고 아름다운 생명의 빛, 소망의 빛으로 거듭나도록 힘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빛은 어둠을 밝혀 주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물러가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고, 모든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더럽고 깨끗한 것을, 좋고 나쁜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어두움이 이 세상을 덮고 완전히 빛이 없는 상태가 삼일동안 지속된다면 아마도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비될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면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정체가 있는 그대로 밝혀지고 어둠이 폭로 됩니다. 이처럼 빛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실체를 바르게 알게 할뿐 아니라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마 5:14)이라고 말하며, 바울이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라고 말하는 것은 낮에 자녀로서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밝혀야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망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 사랑의 빛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빛은 사람들을 깨우고 활동하게 하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빛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활동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면 사람들이 잠을 자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자라날 어릴 적에는 시골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해가지면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다시 해가 동녘에 뜨면 일찍이 일을 하러 들로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이후 사람들은 전등의 밝은 빛 덕분에 어느 시간에든지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활동을 하고 일을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빛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깨우고 활동하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고 뭔가를 향하여 움직이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망이라고 하는 어둠의 그늘에서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이 세상을 깨워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표상이 되는 것이 바로 교회된 우리의 속성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마치 캄캄한 바다위에 암초에 걸리지 않도록 등대를 높이 세워서 배가 가야할 길을 바르게 비춰주는 것과 같이 어두운 세상에 교회는 진리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간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그 빛나는 영광”(찬송가 1절)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 예화
- 참회록 -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악과 방황의 날들을 「참회록」(Confession)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위 ‘극장의 즐거움’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극장에서는 무희들이 음란한 춤을 추기도 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각종 연극들을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는 어린 나이에 한 여인과 동거해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둠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제국 안에 널리 퍼져 있던 마니교에 9년간이나 심취했고, 최고 지도자인 파우스트를 만나 영적 고민을 해결해 보고자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세상엔 처음부터 빛과 어둠이 있었다는 운명론적 이원론을 이야기했고, 어거스틴의 고민은 그 이론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어거스틴은 빛을 밝히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진다는 단순한 원리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빛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는 빛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빛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요,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악과 방황의 날들을 「참회록」(Confession)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위 ‘극장의 즐거움’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극장에서는 무희들이 음란한 춤을 추기도 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각종 연극들을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또 그는 어린 나이에 한 여인과 동거해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둠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제국 안에 널리 퍼져 있던 마니교에 9년간이나 심취했고, 최고 지도자인 파우스트를 만나 영적 고민을 해결해 보고자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세상엔 처음부터 빛과 어둠이 있었다는 운명론적 이원론을 이야기했고, 어거스틴의 고민은 그 이론 안에서는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어거스틴은 빛을 밝히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진다는 단순한 원리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빛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는 빛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빛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요,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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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찬란한 현대 문명의 이기 속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하지만 오히려 그런 풍요로움이 우리들을 점차 영적 무지의 어두움 속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봅니다. 참 빛 되시는 예수님을 늘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므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주의 자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