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성경 본문
마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찬송묵상
땅과 하늘 기뻐하고 만물들은 찬송 부르는 복된 이 밤
찬송요약
1절, 별들은 빛나고 땅은 고요한 밤 베들레헴 아기 예수 구유에 자네
2절, 천사 찬송에 목자 놀라듯 구주 나신 기쁜 소식 온 세상 전하라
3절, 아기예수 오심으로 희생 사랑 평화 정의 은혜 영광 땅에 넘치네
2절, 천사 찬송에 목자 놀라듯 구주 나신 기쁜 소식 온 세상 전하라
3절, 아기예수 오심으로 희생 사랑 평화 정의 은혜 영광 땅에 넘치네
찬송해설
만돌린에 맞추어 즐겁게 부르는 캐롤송으로 중국 쥬 웨이유(Weiyu Zhu;1921~ )와 우 징런(Jingren Wu;1921~ )이 작시하고 카셋렌 무디(K.Moody)가 번역하였다. 곡은 쉬 치구이(Qigui,Shy;1982~ )가 1982년 만들고 1987년에 첸 펜리(Pen-li Chen;1936~ )가 번역하였다.
찬송프롤로그
1절, 거룩한 밤 복된 이 밤 별들은 빛나고 땅은 고요해
언덕들과 숲에 싸인 작은 고을 베들레헴서 아기 예수 구유에 자네
1절, 별들은 빛나고 땅은 고요한 밤 베들레헴 아기 예수 구유에 자네
12월은 크리스마스의 달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일까요? 팻머스 문화선교회 주관으로 서울 소재 중, 고등학생 37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식 조사 (2009년)를 보면 크리스마스는 어떤 날 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의 생일’이라고 대답한 학생 수는 47.1%, 그 밖에 ‘선물 받는 날’, ‘노는 날’ ‘연인과 함께 하는 날’ 등의 의견이 많았습니다. 두 번째, ‘크리스마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산타클로스’라는 대답이 29.9%, ‘크리스마스트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13.4%로 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7.2 %에 그쳤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라고 답한 학생들이 30.7%인데 그들 중 60%가 ‘예수님’보다 ‘산타, 눈, 트리, 캐럴, 선물 등’이 먼저 생각난다고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인 ‘이번 크리스마스 때에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엇가?’라는 질문에는 ‘이성친구와의 데이트’라고 답한 학생들 28.9%로 가장 많았고 교회 행사 9.9% 부모님께 효도 8% 불우 이웃 돕기 3.7% 기타 49.5%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크리스마스의 의미와 관련이 없는 것들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얼마나 변질되고 퇴색되어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탄은 있지만 예수가 없는 성탄! 성탄은 있지만 예수의 성육신의 삶의 본이 없는 성탄!
혹시나 교회의 건물은 있지만 예수의 정신이 없는 그런 교회와 성도는 아닌지 궁금합니다.
왜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도전과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그것은 오늘날 교인들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누가복음 2장 12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표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표적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록 초라한 출생 같지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님은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찬송가 가사에
첫째,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이 되십니다(3절 가사).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둘째,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과,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십니다.
(1절 가사) 누가복음 5장 31-32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은 이 땅에 힘 있고, 가진 자, 배부른 자, 높은 자를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 병든 자, 우는 자, 없는 자, 천한 자를 붙드시고 세워주시고 위로하시고자 말구유 위에 누우셨습니다.
셋째,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생명 되십니다(2절 가사).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질고를 담당하시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이루시고자 말구유 위에 누우셨으며, 훗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습니다.
넷째, 온 교회의 머리와 온 세상의 구주시며, 모든 왕의 왕이요, 심판하실 주님 되고 우리의 영광이 되십니다(4절 가사). 이사야 9장 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성령으로 잉태하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아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모든 짐을 당당하신 구세주이시며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신 만왕의 왕이시라는 신앙고백이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하나님께 존귀와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맞이한 첫 번째 성탄절은 예수님이 누울 곳이 없어 이 집 저 집 방문을 두드리다가 결국 초라하고 냄새나는 말구유 위에 누우신 것처럼, 21세기 성탄절!...
이 귀한 날에 예수님은 오늘도 자신이 거하실 방을 찾기 위해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우리 마음에 예수님은 온데간데없고 성탄과 트리와 망년회의 축제와 술 파티로 내 마음이 분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룩한 밤 복된 이 밤에 언덕들과 숲에 쌓인 작은 고을 베들레헴서 구유에 누워 새근새근 주무시는 아기 예수님”(1절 가사)을 생각하며 구세주로 만왕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뻐 축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덕들과 숲에 싸인 작은 고을 베들레헴서 아기 예수 구유에 자네
1절, 별들은 빛나고 땅은 고요한 밤 베들레헴 아기 예수 구유에 자네
12월은 크리스마스의 달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일까요? 팻머스 문화선교회 주관으로 서울 소재 중, 고등학생 37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식 조사 (2009년)를 보면 크리스마스는 어떤 날 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의 생일’이라고 대답한 학생 수는 47.1%, 그 밖에 ‘선물 받는 날’, ‘노는 날’ ‘연인과 함께 하는 날’ 등의 의견이 많았습니다. 두 번째, ‘크리스마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산타클로스’라는 대답이 29.9%, ‘크리스마스트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13.4%로 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7.2 %에 그쳤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라고 답한 학생들이 30.7%인데 그들 중 60%가 ‘예수님’보다 ‘산타, 눈, 트리, 캐럴, 선물 등’이 먼저 생각난다고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인 ‘이번 크리스마스 때에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엇가?’라는 질문에는 ‘이성친구와의 데이트’라고 답한 학생들 28.9%로 가장 많았고 교회 행사 9.9% 부모님께 효도 8% 불우 이웃 돕기 3.7% 기타 49.5%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도 크리스마스의 의미와 관련이 없는 것들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얼마나 변질되고 퇴색되어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탄은 있지만 예수가 없는 성탄! 성탄은 있지만 예수의 성육신의 삶의 본이 없는 성탄!
혹시나 교회의 건물은 있지만 예수의 정신이 없는 그런 교회와 성도는 아닌지 궁금합니다.
왜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도전과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그것은 오늘날 교인들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누가복음 2장 12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표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표적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록 초라한 출생 같지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예수님은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찬송가 가사에
첫째,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이 되십니다(3절 가사).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둘째,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과,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십니다.
(1절 가사) 누가복음 5장 31-32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은 이 땅에 힘 있고, 가진 자, 배부른 자, 높은 자를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 병든 자, 우는 자, 없는 자, 천한 자를 붙드시고 세워주시고 위로하시고자 말구유 위에 누우셨습니다.
셋째,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생명 되십니다(2절 가사).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질고를 담당하시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이루시고자 말구유 위에 누우셨으며, 훗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습니다.
넷째, 온 교회의 머리와 온 세상의 구주시며, 모든 왕의 왕이요, 심판하실 주님 되고 우리의 영광이 되십니다(4절 가사). 이사야 9장 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성령으로 잉태하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아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모든 짐을 당당하신 구세주이시며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신 만왕의 왕이시라는 신앙고백이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하나님께 존귀와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맞이한 첫 번째 성탄절은 예수님이 누울 곳이 없어 이 집 저 집 방문을 두드리다가 결국 초라하고 냄새나는 말구유 위에 누우신 것처럼, 21세기 성탄절!...
이 귀한 날에 예수님은 오늘도 자신이 거하실 방을 찾기 위해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우리 마음에 예수님은 온데간데없고 성탄과 트리와 망년회의 축제와 술 파티로 내 마음이 분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룩한 밤 복된 이 밤에 언덕들과 숲에 쌓인 작은 고을 베들레헴서 구유에 누워 새근새근 주무시는 아기 예수님”(1절 가사)을 생각하며 구세주로 만왕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뻐 축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 예화
평화의 왕 예수님
헨리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공동체인 교회 생활의 접착제입니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 주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될 사람이요, 용서해야 될 사람이요,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요, 항상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보면 평화의 왕을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처럼 형제와 원수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고, 한 번 상처를 입으면 두고두고 그 상처가 묵은 상처가 되어 고침을 받지 못하는 비극도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를 안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 사람의 실수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그렇고 고부간에도, 형제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형제들까지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앙금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우리에게 평화입니다.”(눅 2:14)
헨리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공동체인 교회 생활의 접착제입니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 주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될 사람이요, 용서해야 될 사람이요,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요, 항상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보면 평화의 왕을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처럼 형제와 원수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고, 한 번 상처를 입으면 두고두고 그 상처가 묵은 상처가 되어 고침을 받지 못하는 비극도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를 안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 사람의 실수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그렇고 고부간에도, 형제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형제들까지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앙금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우리에게 평화입니다.”(눅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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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고요와 평화로움 속에 오신 주님 찬송과 영광 속에 오신 아기 예수 주님을 기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