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식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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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늘찬양하는삶 작성일21-06-20 21:36 조회894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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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의 치유
시 13:1-6,2021.05.23.늘찬양교회
코로나 19 이후 경제상황의 악화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기에 무척 힘들어하며 곳곳에서 절망의 탄식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백신마저도 늦어지는 상황 속에서 인도의 코로나 상황을 보면 정말 불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백신을 맞고 사망하는 사례도 끊임없이 나오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불안은 극에 달하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여러 안타까움 중에서도 더 안타까운 것은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는 더 큰 위기감과 불안을 느끼며 탄식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더욱이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 같지가 않다고 느낄 때 마치 “내가 이거 혹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아닐까?”하는 회의적인 생각마저도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과 느낌은 우리의 삶에 고통과 환난의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될 때, 더욱 심각하게 다가옵니다. 환란과 고통과 질병이 우리의 간절한 호소와 애원에도 불구하고 쉽게 제거되지 아니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임재하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나의 어려운 상황을 아시지 않습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하며 탄식하게 됩니다.
이런 아픔과 탄식 속에서 동일한 아픔과 위기를 겪었던 다윗은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는가?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Ⅰ. 절망 속에서의 탄식(1,2절)
먼저 절망 속에서 탄식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본문 1절과 2절 가운데서 다윗은 “언제까지입니까?”라는 말을 네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지금 어떤 삶의 처절한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나를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이 고통과 이 시련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그렇다면 그 유명한 다윗이 이런 탄식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는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서 2절에 나오는 “원수”라는 단어를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원수”라는 말은 단수로 되어 있는데, 이 “원수”가 누구인가 하는데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죽음(사망)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지금 병상에서 장기간동안 병과 씨름을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가 시편의 여러 곳을 보면 다윗이 병을 치루면서 고생한 흔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시 39편 13절에서 그는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그가 무슨 병에 걸려서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큰 병과 씨름하는 가운데,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들은 누구든지 신체의 질병에 걸리게 되면, 처음 얼마 동안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견디어 냅니다. 그러나 시간이 자꾸 흐르는데도 병에 차도는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악화만 되어 가는 듯하면, 그때부터는 불안해하면서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과연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 주실까? 혹시 내가 결국은 죽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한 마음이 우리를 엄습해오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가운데는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서 적어도 몇 달 이상을 씨름해 본 사람은 이런 감정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에게 죽음의 세력은 점점 다가오고 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멀리 계시는 듯하고,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고개를 돌리고 계시는 것 같은 무서운 느낌 속에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 시간 이 문제를 분명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당신의 자녀들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하는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혹독한 환란과 고통 가운데 있는데도,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체 하거나, 우리의 아픔을 무감각하게 먼발치서 구경만 하시는 그런 분이십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분께서 “언제나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10을 보십시오. 거기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동자같이 지키신다는 것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분이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만큼 완벽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가하면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0:30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시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루에 우리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빠지는지, 알지도 못하고 때로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세세하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좋은 예화 한 가지를 들려드립니다.
저도 종종 들었던 말입니다만 엄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한 친구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너 다시 한 번만 똑같은 잘못을 하면 대문 밖으로 쫓아 내 버릴 거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또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두말없이 그 친구를 끌어안고는 대문 밖으로 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대문을 “꽝”하고 닫아버리셨습니다. 그 때 이 친구는 대문을 두드리면서 “어머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외쳤지만, 대문은 굳게 잠긴 체 한동안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 친구는 울다가 지쳐서 마침내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머니께서 나오셔서 안고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때 어머니께서는 그 친구를 대문 밖으로 쫓아내시고는 더 안타까운 모습으로 대문에 귀를 대시고,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는지를 주의 깊게 보고 듣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대문이 닫히고, 어머니도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신 것 같아서 이 친구는 울고불고 하였지만, 어머니는 바로 거기 계셨고, 오히려 그의 목소리에 더욱 주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즉 어머니가 그 친구를 대문 밖으로 던지신 그 때는, 도리어 어머니께서 그의 말과 일거수일투족에 더욱 귀를 기울이시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의 간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는 것 같은 경험을 할 때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비록 허공을 치는 것과 같고, 캄캄한 밤을 헤매는 것과 같은 순간이라도,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장 가까운데 계시는 시간이며, 마치 어머니가 대문 안에서 귀를 기울이고 계시듯이, 우리의 기도에 더욱 귀 기울이고 계시는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귀한 은혜를 깨달은 시편기자는 아까 시편 66:19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소리에 주의 하셨도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실로 우리의 간구를 어느 때라도 듣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Ⅱ. 탄식에서 기도로(3,4절)
이런 사실을 깨달은 다윗은 이제 1,2절의 탄식에서 벗어나 3,4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다윗이 지금 슬픈 탄식에서 벗어나 기도하고 있는 내용의 첫 번째는 바로 3절의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는 기도입니다. 다윗의 이 기도에는 두 가지 차원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육체적 건강을 회복하게 될 경우에 “눈이 밝아진다.”는 표현을 많이 썼습니다. 더 나아가 스펄전 목사는 이 기도는 다윗이 그의 믿음의 눈을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였다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결국 다윗의 이 기도는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사망의 잠을 자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두 번째 “나의 눈을 밝히소서!”의 기도는 4절의 말씀에 있듯이 “나의 죽음으로 인하여 원수와 대적들이 하나님을 이기었다며 기뻐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적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못되는 것을 고소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사실 오늘 세상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저들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하면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아주 고소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한 번의 실수를 빌미로 하나님을 욕하고 공격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코로나 발생 이후 한 때 교회에 집단 감염자가 발생할 때 입에 침을 바르며 교회를 공격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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