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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됨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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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늘찬양하는삶 작성일21-06-20 21:31 조회7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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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됨의 비유

8:12-17,2021.04.11.늘찬양교회

 

 

하르낙(Harnack)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기독교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간단하게 세 마디로 정의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이웃을 형제로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쉽고도 깨끗한 이야기입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항상 드리는 기도인 주기도문에도 보면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로 시작하여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하며 "아버지"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다른 말 다른 표현이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양자의 관계로 비유하며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2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는 것이 인간의 공로나 행위를 통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양자의 원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됨의 비유를 통해 건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며 당당하게 주의 자녀로 살아가는 축복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양자됨의 원리

 

자녀에는 나면서부터의 본래적인 자녀와 입적된 자녀가 있습니다. 양자제도는 동서양을 비롯해서 옛날부터 있었던 제도로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현재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특히 남성 위주의 족보를 중요시하던 로마 시대에는 비록 딸자식이 있다하더라도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다른데서라도 기어이 남자를 데려와 양자로 입적을 시킴으로 그 자리를 메우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양자가 된 자녀는 비록 직계의 자녀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완전한 자녀로서 행세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양자란 그 관계성을 알고 보면 참으로 특별한 은혜입니다. 아들이기에 아들 되는 것과, 양자로서 아들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만약 고아원 같은 데서 자라던 불쌍한 아이 하나가 어느 가정의 양자로 들어갔다면, 그 이후에 그 아이가 갖는 권한은 대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양자됨을 비유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양자란 낳은 것도 아니요 피가 섞인 것도 아닙니다. 이는 전혀 상관도 없고, 사실 아무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완전 무자격자에게서 완전한 자격자로 옮겨오는 것이 양자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오직 아버지의 주권적 특혜가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 되는 사람이 너는 내 아들이다하고 호적에 올리게 되면, 그것으로 일은 끝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아들을 생각하며 사도 바울은 그것이 곧 나요, 우리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의 양자 됨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혜의 결과인 동시에 신자의 최고의 권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요, 죄인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을 믿는 순간 놀라운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양자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원래는 아들이 아니었는데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핏줄을 중시하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야 좀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지만 로마 사회에서는 양자를 삼고 그 양자에게 모든 권세를 물려주는 것은 일반적인 전통이었습니다.

 

양자됨과 그 양자의 권세가 어떠한지는 카이사르(시저)와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관계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는 가까운 친척을 양아들로 삼고 모든 권리를 넘겨주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지만 카이사르는 원로원 파에 의해서 불의의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카이사르가 죽고 그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그것이 평지풍파를 일으켰습니다. 매우 낯 설은 인물이 그의 양아들로 지목되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 뒤에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 받는다

 

처음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이 공개되었을 때 로마 시민의 대다수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먼 친척이지만 정통 귀족출신이 아니었습니다. 별 직책도 없는 18세의 풋내기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카이사르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그 재산도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얼마 되지 남지 않을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역사가들은 옥타비아누스가 받은 가장 큰 유산을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그 성을 물려받은 것이라 분석합니다. 옥바티아누스는 양 아버지 카이사르라는 이름의 후광을 배경으로 당시 권력자인 안토니우스를 이기고 결국 로마 최초의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무명의 옥타비아누스를 일약 황제의 자리에 올린 것입니다.

 

 

. 양자의 영

 

15절 말씀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 종은 상전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혹시라도 잘못해서 벌 받지 않을까?" 그러한 심령의 무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보면 무서워합니까? "아빠!"라고 부르며 반가워서 쫓아가 아버지의 품에 안깁니다. 우리의 심령도 하나님을 향해서 열린 마음, 사랑의 마음, 친근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우리의 모든 속사정을 하나님 아버지께 아룁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1436절입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도 역시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서 언제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양자라고 하니까 친아들과는 달리 차별대우를 받을 것 같고, 천대를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모세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실에 들어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또 에스더도 생각해 봅니다. 그의 부모가 죽었습니다. 친척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데려다가 자기의 친딸처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잘 양육했습니다.

 

옛날 유대와 로마의 법에 의하면, 가령 어떤 아버지가 많은 빚을 남기고 죽었다면 그 아들이 대신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으면, 부득이 노예로라도 팔려가서 갚아야 하는 것이 아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붙들려 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와서 아들들 중 하나를 골라서 이 아이는 내가 양자로 삼겠다.”고 하면, 그 아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 강한 의무와도 상관이 없이 양자로 입양된 집에서 아들 노릇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무거운 빚의 짐도 양자가 되는 순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우리의 허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금,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점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황제 네로도 양자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의붓아버지 클라우디우스황제가 죽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난 뒤에 양자였던 네로가 로마제국의 5대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그만큼 양자라고 하면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인정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양자는 오히려 친아들보다도 더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고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강화도령이었던 더벅머리 총각이 철종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강화도령이 아닙니다. 옛날 철부지 시골 총각 때 하던 일들을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써, 책임을 진 주상으로써, 그는 당당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당당한 주인공들입니다. 나의 신분이 이미 바뀌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걸맞게 당당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4-15)

 

 

. 하나님의 후사

 

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 당시에는 양자가 되면 막대한 권한이 양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양자를 삼을 때는 반드시 증인을 세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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