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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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늘찬양하는삶 작성일21-06-20 21:35 조회1,038회 댓글0건첨부파일
- 21년6월6일-323장 부름 받아 나선이몸355장.hwp (68.5K) 35회 다운로드 DATE : 2021-06-20 21:3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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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355장)
성경본문: (고전 4: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작사자: 이호운(李浩雲;1911-1969)목사
평남 강동 출생으로 감리교 협성대학교와 미국 남감리교대학교(S.M.U.) 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지금의 목원대학교를 만들어 신학부장을 역임하였던 이호운(李浩雲;1911-1969)목사가 미국 유학생 시절에 “저도 주님을 위하여 몸 바쳐 충성하며 살기를 원합니다.”는 헌신과 결단을 담아 만들었다.
작곡자: 이유선(李宥善;1911-2005)박사
평양 출생으로 배제고등보통학교, 연세대학교 상과, 아메리카 콘서바토리 성악과를 졸업하고, 시카고 음대 대학원에서 수학 한 후 교회에서 찬양대를 지휘하며 교회음악협회 회장을 역임한 이유선(李宥善;1911-2005)박사가 1967년 작곡하였다.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의 찬송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이 세상 사람들은 행복의 가치 기준을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두고 살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연약하고 죄 많은 나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시어 하나님의 일을 맡기신 그 은혜가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 이 생명 다하는 그 날까지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하고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찾아가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와 헌신이 담겨 있는 찬송입니다.
1절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1절,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주 만 따라 가오리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죄 사함을 얻고 구원함을 받아 하늘나라의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강한 자와 부유한 자. 많이 배운 자. 권력이 높은 자, 지위와 명예를 가진 자들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미련하고 나약 한자들 그리고 이 땅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불쌍한 영혼들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기록하기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나면서부터 어부로 아버지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고기 잡는 일에만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과 언어는 고기 잡는데 필요한 단순 언어로서 그리 높은 지식과 학문과 예절이 필요치 아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수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 또는 매국노로 취급하는 마태와 같은 세리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으며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마 11:19)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멸시할 정도였습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은 앉은뱅이와 많은 소경을 고쳐주시고 중풍병자와 나병환자들을 고쳐 주시며 또한 친히 이들의 벗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낮고 천하며 무능한 자, 연약한 자들을 불러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남을 위하여 겸손하게 섬기는 자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십니다. 그리고 증인의 요소가 ‘가서 생명을 나누어 주고 전하는 것’이 주된 임무인 것을 명심하고 자기 생명을 아낌없이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들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2절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2절, 아골 골짝 소돔 같은 거리에도 찾아가서 주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리다.
부름을 받은 자들은 지경(地境)을 초월하여 주님이 명하시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말씀만 가지고 기꺼이 나가겠다는 기개와 의지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2절의 가사에 기록된 ‘아골’은 ‘괴로움’이란 뜻으로 여리고 근방의 험난한 죽음의 골짜기를 가리킵니다. 이곳은 아간이 노략한 물건을 도적질한 죄로 인해 아이성 공격에서 이스라엘이 패하자 여호수아가 이곳에서 이간을 돌로 쳐 죽이고 묻은 장소입니다(수 7:20-26), 그리고 ‘소돔’성은 ‘태움’이란 뜻으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거하던 성으로 성적으로 타락하고 죄악이 관영하여 더 이상 바라만 볼 수가 없어 하나님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킨 죄악의 성입니다(창 19:23-28).
성경에 보면 요나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 되었음이니라.”(욘 1:2)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니느웨 성이 우상 숭배를 비롯하여 궤휼, 강포, 늑탈, 극도의 이기심(습 2:15) 등이 만연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멸망을 받게 되었으니 너는 가서 저들에게 회개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도록 이르라는 말입니다. 이때 요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수십만의 영혼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외면하고 「니느웨 백성들은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은 민족이니 당연히 멸망 받아야 한다. 그런데 저들이 회개하여 멸망이 중단된다면 그것은 불공평하다.」며 ’니느웨‘ 성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을 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도피를 초자연적으로 중단시키시고 요나의 배역함을 스스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요나를 니느웨 성으로 돌이켜 회개의 복음을 증거 할 때에 왕은 물론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욘 3:4-6).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들의 죄악에도 깊이 관여하셔서 그들의 타락을 중지시키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살아 계심과 만유의 주(主)되심을 깨우치시기를 원하십니다(창 6:11-13).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우리는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과 같은 거리에도, 복음 들고 찾아가서 주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므로 이 땅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많이 만들어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3절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3절, 존귀 영광은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겉으로는 “잠깐 놀러왔어요, 억지로 끌려 왔어요, 심심풀이로 한 번 나왔어요!”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본심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런 평화, 사랑, 은혜, 능력 등을 얻고자 교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참 만족을 줄 수 있어야 성장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기쁨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교회끼리 서로 반목하고 서로 질투하는 것을 물론이고 같은 교인들끼리도 서로 미워하고 분쟁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직도 그 속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교회의 건물 크기를 자랑하고, 성도 수를 자랑하는 외적인 모습을 통하여 극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결코, 건물의 크기나 성도 수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얼마나 예수님을 능력을 재현하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선포의 능력, 자신의 제자들의 발 씻김을 통해 보여 주셨던 겸손의 능력, 병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치는 능력, 또 십자가에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희생의 능력 등을 얼마나 재현하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현대교회들이 이런 예수님의 능력을 하나같이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너무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교회 치장과 고급 승용차 그리고 고급 주택들을 통해 자기 교회의 크기와 세력들을 자랑하려만 하다 보니 목회자의 영성과 교회의 영성은 어디로 가고 회칠한 무덤처럼 공허한 울림만 울려나고 있었습니다.
‘은성수도원’ 故 엄두섭 목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큰 교회 목사나 신부, 그리고 큰 절의 주지 스님에게는 영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척교회 목사나 수도승이나 수사에게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 교회와 큰 절에는 왜 영성이 없고, 작은 교회와 작은 절에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영성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고난의 차이점 때문입니다. 큰 교회 큰 절은 고난이 없지만 작은 교회 작은 절은 고난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고난이 십자가는 아닙니다. 결코 불교의 고행은 십자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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